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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의 산방야화 홍 통사(1)
기사입력  2017/12/18 [15:43]   유달신문 편집국

 

법무사.전남인터넷신문회장 박영동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신분상의 장벽을 넘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외교적인 성과를 거두고 선조대왕으로부터 광국공신2등관과 당릉군으로 봉함을 받고 후손들 또한 벼슬길에 올라 풍운의 삶을 영위하였던 기인이 있다.

공께서는 40여 가지의 야담과 소설등 조선후기에 유행하였던 소설 ‘이장백전’의 실제 주인공이 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성호사설, 하담파적록, 통문관지, 동편위공견사문록, 열하일기, 옥갑야화 등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스스로 활약한 공로가 마치 왕조의 운명을 좌우하고도 남을 정도로 혁혁하였음에도 기득권 양반들의 수없는 핍박으로 인하여 흙속에 묻힌 진주와도 같이 빛을 잃어 역사의 진창에 고립무원의 지경이 되었다.

따라서 공의 행적에 대하여 일파만파의 추리와 상상을 낳고 각자 기술하는 사람들의 편견에 의하여 비록 중요한 맥락은 근본을 잃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러 방향으로 다양하게 곡해되어 전래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가 존속하는 순간에도 공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1910년 을사조약으로 패망하여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1928년 방계후손이 조상의 공로가 세상에 영원히 묻혀버릴지 모른다는 절박감으로 수차례 위당 정인보 선생에게 유사 편찬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정인보 선생은 나라가 없어지고 가족도 제대로 몰라보는 세상에 조상을 추모하는 후손의 간곡한 의리에 감동하여 부족한 자료를 극복하고 드디어 “당릉군유사”를 집필하게 되었다.

고려 말 공민왕이 피살되자 친원파 이인임은 우왕을 내세우고 명나라의 사신 채빈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자신에게 형세가 불리하게 될 것이 염려되어 두만강부근에서 사신을 살해하고 정도전등 친명파를 몰아내었다.

최영, 이성계는 군사를 일으켜 이인임을 제거하여 유배를 보냈는데 이성계의 정적인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에 망명하여 이성계가 친원파 이인임의 후사라고 모함을 하자 명나라에서는 이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그대로 기록을 하였다.

명나라에 사대외교를 주창하면서 조선왕조의 태동과 함께 시작된 수치스런 종계의 변은 약 200년간의 지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자도 수정이 되지 않고 국가적인 현안으로 남게 되었다.

1572년 9월 11일에 선조대왕이 중국사신을 접견할 때에 “종계의 악명을 바로잡는 일에 관해 대략 말하고 이어 단자(간절한 뜻이 전달되도록 하는 구어체의 문장)로써 자세히 기록해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통사를 시켜 한어로 번역해 달라고 만들어 예조에 주어 아뢰도록 하였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 되었다.

명나라는 이후에도 조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므로 조정에서는 1574년에 종계변무의 중차대한 사명을 지우고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공께서는 통역관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공은 젊어서 불우하였으나 의기가 있었는데 북경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통주에 이르러 청루를 노닐다가 자색이 특별히 뛰어난 여인을 보고 마음에 즐거워 하였다.

주인 할미에게 부탁하여 접대하게 하였는데 그가 소복을 입은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묻자 ‘제 부모는 본디 절강 사람인데 명나라 연경에서 벼슬살다가 불행히도 염병(장티푸스)에 걸려 한때에 다 돌아가셔서 관이 객관에 있습니다. 저는 외동딸이고 고향으로 모셔가 장사지낼 밑천이 없으므로 마지못하여 스스로 몸을 팔았습니다“고 말을 마치고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렸다.

공이 듣고 불쌍히 여겨 그 장례비를 물으니 3백금을 써야 하겠기에 망설이지 않고 공금이 포함된 전대마저 털어서 주고 가까이 하지도 않고, 성명을 물었음에도 끝내 말하지 않으므로 ”대인께서 말씀하지 않으려 하시면 저도 감히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고 하므로 성이 홍씨라 하고 나오자 동행들이 모두 그의 우활함을 비웃었다.

공은 환국한 뒤 공금의 빚을 갚지 못하고 체포되어 형을 받아 옥살이를 하였다.

나라에서는 이후 10여명의 사신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종계의 변을 해결하려 부단히 노력하였음에도 모두가 허락받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임금이 노하여 교지를 내려 이번에 가서 또 청을 허락받지 못하고 돌아오면 마땅히 한사람은 목을 치겠다고 하니 어떠한 역관도 감히 가기를 지원하는 자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역관들이 모두 모여 의논하기를 “공은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희망이 없으니 우리들이 돈을 모아 공의 빚을 갚아주고 나오게 하여 그를 명나라에 보내기로 하되, 만일 그 일을 허락 받고 오면 영광이요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한 될 일은 없을 것이다”고 알리니 공이 개연히 수락 하였다.

1584년에 극적으로 석방이 된 공께서 사신 황정욱을 수행하여 북경에 도착을 하였는데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 있는 가운데 한 기병이 쏜살 같이 달려와 홍통사가 누구시냐고 묻고는 말하기를 명나라의 예부시랑 석성이 공을 맞이하러 나왔다고 하였다.

공께서는 이번에 실패하면 목숨을 보전하기도 힘든 절체절명의 순간에 온갖 수심으로 심란하였는데, 명나라에 사절을 따라 수차례 북경을 방문해 보았지만 상국의 예부시랑 정도의 지체 높은 벼슬아치가 사신도 아닌 자신을 마중하러 나왔다 하니 기가 찰 노릇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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