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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의 산방야화 홍통사(2)
기사입력  2017/12/21 [18:21]   유달신문 편집국

 

법무사.전남인터넷신문회장 박영동

형형색색의 백 개나 되는 비단을 장대에 메달아 바람에 날리며 펄럭이는데 모두가 “보은”이라는 글씨가 선명 하였으며, 장중한 분위기에 압도되고 정신이 혼미하여 조금 있다가 보니 계집종 10여명을 거느리고 어느 귀부인이 장막 안으로부터 나왔다.

 

공께서는 몹시 놀라고 황망하여 서둘러 물러가고자 하니 예부시랑 석성이 나타나 큰소리로 “통주에서 은혜를 베푼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가 부인의 말을 들으니 공은 참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인데 이제야 다행히 만나니 크게 위안이 됩니다” 하였다.

부인은 곧 땅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이르기를 ”이것은 보은의 절이니 당신은 기꺼이 받으시기를 바라며 높은 은혜를 입어 감회가 마음에 맺혔으니 어느 날엔들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는 잔치를 베풀었다.

예부시랑 석성이 홍통사가 정계변무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온 것을 알고 “당신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정성을 다하여 받들겠 나이다”고 약속한 후 한 달 남짓한 동안에 과연 청한 대로 허가 되어 무려 200여년 만에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통의 수정으로 숙원을 해결하였다.

공께서 돌아 올 때 부인이 전함 10개에 비단 100벌을 나누어 담아 주면서 ”이것은 첩이 공의 은혜를 되새기며 날마다 빠지지 않고 손으로 하나씩 결을 세워 짜가지고 언젠가는 공이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준비한 것이니 애써 받으시라“고 청하였음에도 굳이 거절하고 돌아 왔다.

공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또다시 비단 깃대가 휘황찬란하게 흔들리며 나부끼는데 부인의 청이 너무도 간곡하여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성정이 맺힌 보은의 선물을 거두어 들였다.

부인께서 보은의 깃발과 함께 피 눈물로 들려준 그동안 자신에게 닥쳐온 운명적인 신변이야기는 그야말로 극적인 반전 중 반전 이었다.

부인은 공께서 도와준 300백금으로 부모님의 장례를 무사히 치르고 혈혈단신 고향인 절강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아버님과 친분이 깊었던 시랑을 찾아뵙고 다시 만날 날이 요원하여 작별 인사를 드리려는 참 이었다.

뜻 밖에도 시랑의 본부인께서는 중한 병에 걸려 사경을 해매이고 있었는데 차마 그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어 무심결에 병 수발을 들게 되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는 지극정성의 병구완도 소용없이 다시는 돌아 올수 없는 아득한 세상으로 홀연히 발길을 재촉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친 부모를 여의는 거친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은지가 엊그제 인데 어머니와 같은 부인을 사별하고 나니 더 이상의 삶에 대한 희망 한 조각이라도 지탱할 수가 없었다.

망망한 이 세상에서 오로지 혼자 남은 어린 소녀는 부인을 잃고 슬퍼하는 한 남자에 대하여 가없는 연민의 정이 솟고, 그토록 정성을 들여 병간호를 하던 어린 소녀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과 함께 거친 세파에 그대로 내보낼 수 없는 숙명이 서로 마주쳐 급기야는 한 몸이 되었다.

평생 화류계의 천한 꽃으로 일생을 살아야할 풍전등화의 운명 앞에 극적으로 찾아온 행복은 모두 공께서 의기로 투척한 현금으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그 고마움을 가슴속에 새겨가며 날마다 길쌈의 고행을 멈추지 않았다.

의로운 남자의 기상을 타고난 석성 또한 부인의 전설 같은 운명적인 만남을 전해 듣고 조선에서 그토록 인간의 풍미를 갖춘 의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그 정을 날마다 경외하고 숭상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인간의 의지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300백금이나 되는 거금을 순식간에 초개와 같이 던지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돌아 설수 있는 남자가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공의 지극한 마음이 부인과 예부시랑 석성을 움직이고 보은에 대한 열정이 명나라의 조정을 움직여 왕조의 숙원 사업이 1584. 11. 1.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선조대왕은 비로소 왕조의 체면을 살려 조상을 대할 면목이 생기고 백성들에게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였다는 자긍심과 함께 통치의 기반을 마련해준 공에게 파격적인 벼슬과 함께 노비와 식읍을 하사 하였는데 현재는 청담동으로 공께서 거주하시던 당시에는 ‘보은동’이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부산진에 상륙한 후, 하루 만에 동래성이 함락되고 20여일 만에 한양까지 점령을 당하여 선조가 평양으로 피난을 가게 되는 등 왕조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과 같았다.

고려 말에 이미 발명한 대포들이 각 지방마다 현청의 병기고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무용지물이 되어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군사들이 앞장서 산으로 도망가 버린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은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길 밖에 없었다.

왜가 조선을 방심하게 만든 요인은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길만 내어 달라고 하였기에 명나라 또한 조선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쉽사리 군대를 파견 할 리가 없었다.

한시가 아쉬운 순간에 조정에서는 또다시 공으로 하여금 북경으로 달려가 구원병을 데려 오도록 충차대한 사명을 지워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도 병부상서의 벼슬에 오른 석성의 도움을 받아 “조선에 왜가 거주하게 되면 반드시 요동을 침범하게 될 것이고 명나라도 안전하지는 못할 것이다”는 논리로 명의 조정을 설득하여 이에 감응한 이여송과 함께 5만의 구원병을 데려와 침몰 직전의 왕조를 건져 올렸다.

호남에서 이순신이 일어나 왜적의 침입을 물리칠 시간을 벌어준 것이 명나라 군대의 파병이었는데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다급하고 어려웠는지는 더 이상의 언급이 불요하다.

노구를 이끌고 공께서는 이여송의 통역관이 되어 전쟁터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다가 임진왜란이 끝나가는 해인 1598년에 이승에서 자신의 임무를 모두 마친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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